2016년 10월 24일 월요일
아이작 뉴턴 전기 『Never at Rest』 번역본 구입
별 생각없이 출판사 광고지를 뒤지다가 고 리처드 웨스트폴(Richard S. Westfall)의 역작 『결코 멈추지 않는 Never at Rest』이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학사 논자시를 준비하면서 전기 한 권 읽으려다가(논자시 기출 문제 중에 자신이 읽은 전기에 대한 간략한 비평을 쓰는 것이 있어서) 그 엄청난 분량에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포기하고 대신 마리오 비아지올리(Mario Biagioli)의 『갈릴레오, 총신 Galileo, Courtier』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여하간 그런 아픈 기억 때문에 언젠가는 한 번 따로 읽고 말리라는 생각을 했는데, 900쪽이 넘는 분량의 압박은 그러한 시도 자체를 어렵게 했었다. 전공이 과학사도 아니고... 이렇게 번역이 나와준 것만 해도 고마울 따름이다. 번역자가 얼마나 큰 고생을 했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훤하다. 이 책은 번역에 문제가 있어도 심한 말은 하지 않아야겠다.
그런데... 이거 언제 다 읽지?
2016년 10월 18일 화요일
스타2 프로리그 폐지 ㅠㅠ
아래는 기사 링크
[뉴스] 이제는 역사속으로... KeSPA, 스타2 프로리그 폐지 발표
http://www.inven.co.kr/webzine/news/?news=165740
KeSPA,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운영 종료... 스타2 5개팀 해체
http://www.fomos.kr/esports/news_view?entry_id=34193
스타2 프로리그가 이렇게 끝나다니...
지난 프로리그 결승전 진에서 선수들 인터뷰에서도 걱정되는 발언이 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마는구나.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쓰려니까 할 말이 없어지네. 개인리그는 어느 정도 유지될 것 같지만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르겠다.
아쉬운 마음은 감출 길 없지만 그 동안 프로리그 후원해 주었던 팀과 선수들 덕분에 즐거웠다는 점은 언급하고 싶다.
2016년 10월 16일 일요일
입증의 예측 기준: 가설-연역적 방법(Hypothetico-Deductive Method)
1. 산욕열의 극복: 젬멜바이스의 도전
헴펠(Carl G. Hempel)은 그의 책, 『자연과학철학(Philosophy Of Natural Science)』에서 헝가리 태생의 의사 젬멜바이스(Ignaz P. Semmelweis, 1818-1865)의 산욕열(childbed fever/puerperal fever) 연구 사례를 통해 과학적 가설(hypothesis)이 어떻게 시험되는지 보여준다.[1] [2]
이야기의 주인공인 젬멜바이스는 1844년부터 1848년까지 5년 동안 비엔나 종합병원에서 산욕열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산욕열은 통상 출산이나 유산 이후 여성 생식기의 감염으로 나타나는 발열성 질환으로 병원에 따라 사망률이 최고 30%에 육박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질환이었다. 여하간 젬멜바이스가 근무하던 비엔나 종합병원에는 두개의 산부인과가 있었는데, 젬멜바이스는 이 병원의 제 1 산부인과 의사 소속 의사로 1산부인과에서 분만하는 산모가 산욕열에 희생되는 비율이 매우 높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하였다. 1844년에는 제1 산부인과에서 분만한 3,157명의 산모 가운데 8.2%에 이르는 260 명의 산모가 산욕열로 사망하였다. 1845년에는 사망률이 6.8%, 1846년에는 11.4%였다. 이 사망률은 옆 건물에 있는 제2산부인과가 제1산부인과와 거의 같은 수의 산모를 수용했음에도 산욕열로 인한 사망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제2산부인과의 산욕열 사망률은 같은 해에 각각 2.3%, 2.0%, 2.7%였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젬멜바이스는 여러 가설을 검토하였다. 당시 널리 인정받고 있던 한 견해는 산욕열이 해당 지역의 나쁜 공기(혹은 기운)에 의한 전염성 질환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젬멜바이스는 산욕열의 2산부인과에 비해 1산부인과에서 압도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과 들어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이 견해는 산욕열이 비엔나 종합병원에서는 창궐하면서 병원 바깥 비엔나 지역과 비엔나 주변 지역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해명할 수 없었다. 산욕열이 콜레라와 같은 유행병이라면 그처럼 장소를 고르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젬멜바이스는 제1산부인과에 입원하기로 되어 있던 산모들 중 일부는 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병원으로 오던 도중에 진통이 일어나 길에서 분만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가 겪었음에도 노상에서 분만한 산모들의 사망률은 제1산부인과의 평균 사망률보다 훨씬 낮았다.
다른 가설은 제1산부인과 높은 사망률이 정원 초과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젬멜바이스는 산모들이 악명 높은 제1산부인과에 입원 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기 때문에 2산부인과가 더 많은 환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떠돌던 두 가지 비슷한 추측, 환자의 식사와 일반적 간호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견해도 두 산부인과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점을 확인하자 버렸다.
헴펠(Carl G. Hempel)은 그의 책, 『자연과학철학(Philosophy Of Natural Science)』에서 헝가리 태생의 의사 젬멜바이스(Ignaz P. Semmelweis, 1818-1865)의 산욕열(childbed fever/puerperal fever) 연구 사례를 통해 과학적 가설(hypothesis)이 어떻게 시험되는지 보여준다.[1] [2]
이야기의 주인공인 젬멜바이스는 1844년부터 1848년까지 5년 동안 비엔나 종합병원에서 산욕열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산욕열은 통상 출산이나 유산 이후 여성 생식기의 감염으로 나타나는 발열성 질환으로 병원에 따라 사망률이 최고 30%에 육박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질환이었다. 여하간 젬멜바이스가 근무하던 비엔나 종합병원에는 두개의 산부인과가 있었는데, 젬멜바이스는 이 병원의 제 1 산부인과 의사 소속 의사로 1산부인과에서 분만하는 산모가 산욕열에 희생되는 비율이 매우 높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하였다. 1844년에는 제1 산부인과에서 분만한 3,157명의 산모 가운데 8.2%에 이르는 260 명의 산모가 산욕열로 사망하였다. 1845년에는 사망률이 6.8%, 1846년에는 11.4%였다. 이 사망률은 옆 건물에 있는 제2산부인과가 제1산부인과와 거의 같은 수의 산모를 수용했음에도 산욕열로 인한 사망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제2산부인과의 산욕열 사망률은 같은 해에 각각 2.3%, 2.0%, 2.7%였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젬멜바이스는 여러 가설을 검토하였다. 당시 널리 인정받고 있던 한 견해는 산욕열이 해당 지역의 나쁜 공기(혹은 기운)에 의한 전염성 질환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젬멜바이스는 산욕열의 2산부인과에 비해 1산부인과에서 압도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과 들어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이 견해는 산욕열이 비엔나 종합병원에서는 창궐하면서 병원 바깥 비엔나 지역과 비엔나 주변 지역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해명할 수 없었다. 산욕열이 콜레라와 같은 유행병이라면 그처럼 장소를 고르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젬멜바이스는 제1산부인과에 입원하기로 되어 있던 산모들 중 일부는 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병원으로 오던 도중에 진통이 일어나 길에서 분만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가 겪었음에도 노상에서 분만한 산모들의 사망률은 제1산부인과의 평균 사망률보다 훨씬 낮았다.
다른 가설은 제1산부인과 높은 사망률이 정원 초과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젬멜바이스는 산모들이 악명 높은 제1산부인과에 입원 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기 때문에 2산부인과가 더 많은 환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떠돌던 두 가지 비슷한 추측, 환자의 식사와 일반적 간호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견해도 두 산부인과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점을 확인하자 버렸다.
2016년 10월 12일 수요일
새로 산 책들
이번에 새로 구입한 책. 오른쪽부터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 이노베이션과 기업가정신』(이하, 『모시이노』), 『다윈,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의 승리』, 『플라잉 위치』1-4권.
우선 『모시이노』, 전편인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이하, 『모시도라』)의 후속작, 『모시도라』를 꽤 재미있게 읽었기에 그냥 구입함. 몇 주 전에 『모시도라』를 다시 읽었는데, 처음에 읽을 때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예전에 읽었을 때는 그냥 라이트 노벨 읽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다시 읽어보니 삶의 경영방식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됨.
다음은 『다윈,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의 승리』. 이건 그냥 책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구입했다. 인간 행동 해명을 위한 생물학적 프로그램, 이를 가리켜 사회생물학, 신다윈주의, 적응주의, 진화심리학, 동물행동학, 유전자적 관점, ……. 어떻게 부르건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여하간 내가 보기에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은 자신의 마음에 안드는 것에는 '환원주의'라고 딱지를 붙이며 비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칭 '인문학자'나 사회, 역사, 정치, 과학이 자신들의 규정하는 '정의(Justice)'에 맞아 떨어져야만 참되다고 믿는 사회 정의 전사(Social Justice Warrror, SJW), 빅 브라더처럼 신어(Newspeak)를 다른사람에게 강요하려는 정치적 올바름 경찰(Political Correctness Police)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당한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진화생물학적 연구에 이러저러한 한계가 있을 수는 있지. 그건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이 가진 특성이고, 진화생물학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건전하고 날카로운 비판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소위 비판자들은 이러한 인간 대상 연구를 그들의 편협한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낙인찍기를 즐긴다는 점이 문제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에 대한 진화생물학적 연구를 접근하는 책의 출간은 환영할만 하다.
마지막으로 『플라잉 위치』, 매우 마음이 편안해지는 작품이다. 애니메이션도 잔잔하고 좋고……. 연구실에 놓아두고 있다가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을 때 읽어야지. 확실히 치나츠는 엄청나게 귀여움.
2016년 9월 30일 금요일
'주의(-ism)'와 '주의자(-ist)'
"'OO주의'가 무엇인지 공부나 먼저 하시고 말씀하시죠."
"공부는 셀프, 'OO주의'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
위의 말은 최근 스스로를 'OO주의자'라고 칭하는 이들이 비판받을 때 제시하는 전형적인 답변 중 일부이다. 그런데 이러한 답변이 유효한 답변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스스로를 'OO주의자'라고 칭하는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OO주의'를 잘 알고 있을 필요도, 공부할 필요도 없다. 위의 답변은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악당들의 전형적인 술책일 뿐이다. 이러한 술책에 넘어가면, 문제의 핵심만 흐려질 뿐이다. 간단한 예를 통해 왜 저런 답변을 수용하면 안 되는 지 살펴 보자.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우리는 1930-40년대의 '나치주의자' 혹은 '국가사회주의자'로 불리는 이들의 행동을 비판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스스로를 '국가사회주의자'라고 칭한 이들은 유럽 전역에서 전쟁을 일으켰고,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폴란드인, 집시, 성소수자, 장애인 등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수많은 건축물, 예술품을 파괴하고 도적질했으며, 사상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나치주의자를 악당 혹은 인류 문명의 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을 하기 위해 20세기 초중반의 국가사회주의를 열심히 공부할 필요는 없다. 국가사회주의가 무슨 사상이건 관계없이, 스스로를 국가사회주의자료 규정한 이들이 저지른 행동이 비판의 근거인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행동에 대해 국가사회주의자 내부에서 비판이 없었다는 점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정말로 문제 있는 집단임을 보여준다. 설령 국가사회주의가 내용면으로는 굉장히 성스러운 사상이라고 해도 국가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유효하다.
"공부는 셀프, 'OO주의'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
위의 말은 최근 스스로를 'OO주의자'라고 칭하는 이들이 비판받을 때 제시하는 전형적인 답변 중 일부이다. 그런데 이러한 답변이 유효한 답변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스스로를 'OO주의자'라고 칭하는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OO주의'를 잘 알고 있을 필요도, 공부할 필요도 없다. 위의 답변은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악당들의 전형적인 술책일 뿐이다. 이러한 술책에 넘어가면, 문제의 핵심만 흐려질 뿐이다. 간단한 예를 통해 왜 저런 답변을 수용하면 안 되는 지 살펴 보자.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우리는 1930-40년대의 '나치주의자' 혹은 '국가사회주의자'로 불리는 이들의 행동을 비판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스스로를 '국가사회주의자'라고 칭한 이들은 유럽 전역에서 전쟁을 일으켰고,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폴란드인, 집시, 성소수자, 장애인 등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수많은 건축물, 예술품을 파괴하고 도적질했으며, 사상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나치주의자를 악당 혹은 인류 문명의 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을 하기 위해 20세기 초중반의 국가사회주의를 열심히 공부할 필요는 없다. 국가사회주의가 무슨 사상이건 관계없이, 스스로를 국가사회주의자료 규정한 이들이 저지른 행동이 비판의 근거인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행동에 대해 국가사회주의자 내부에서 비판이 없었다는 점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정말로 문제 있는 집단임을 보여준다. 설령 국가사회주의가 내용면으로는 굉장히 성스러운 사상이라고 해도 국가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유효하다.
헴펠의 까마귀 역설(The Paradox of Ravens)
가설을 시험하는 중에 얻은 경험적 자료가 (가설을) 입증하는(confirming) 성격을 지니는 지, 반입증(disconfirming)하는 성격을 지니는지에 대한 판단은 실제 과학의 연구에서는 어떠한 지체도 없이, 그리고 넓은 의견의 일치 속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이 입증과 반입증의 일반적 기준을 제공하는 명시적 이론에 근거한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상황은 실제 과학연구에서 연역추론을 사용하는 방식과 비교할 만하다. 그 방식 역시 명시적으로 기술된 논리적 추론 체계를 거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당한 연역추론의 기준을 형식논리학에서 제시할 수 있고, 또 제시해 온 것과는 달리, 입증과 반입증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일반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만족스러운 이론이 없는 듯하다. – 칼 구스타프 헴펠(Carl Gustav Hempel, 1965: 4/t20)[1]
가설은 무엇에 의해 입증되는가?
과학에서 가설(hypothesis)의 입증(confirmation)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우리가 수용하고 있는 다양한 과학적 가설을 생각해 보라. 가설은 증거(evidence)에 의해 입증될 때에만, 수용할 수 있으며 주장 가능하다. 그렇기에 어떤 가설을 지지하는 과학자는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를 모으려 하고, 그 가설을 반대하는 과학자들은 그것을 뒤집는 증거를 모으려 한다. 그렇기에 과학 논문을 읽다 보면 ‘증거’나 ‘지지’와 같은 표현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앞선 인용문에서 헴펠이 말한 바와 같이 입증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철학적 이론은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e는 h의 증거이다” 혹은 “e는 h를 입증한다”가 참이 되는 조건을 규정하는 이론 중 철학자 (거의) 모두가 지지하는 받은 이론은 없다. 실제 많은 과학자들이 “이 가설은 입증되었다”, “이 실험 결과는 해당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이다”와 같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입증 이론이 제시된 적은 없다.
어차피 철학자라는 족속이 남의 견해에 쉽게 동조하지 않으니 불일치는 당연하다 생각하고 넘어가자. 그렇다 해도 과학철학자들이 어떤 입증 이론들을 제안하였는지, 그리고 그 이론들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일단 과학철학 분야 선전용으로 쓰는 글인만큼 자극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질문: 노란 송충이의 발견은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가설을 입증하는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본인의 직관에 따라 대답해 보라.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 같다. 노란 송충이가 까마귀의 색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을 입증할 수 있겠는가? 노란 송충이는 해당 가설과 무관하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직관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할 까마귀 역설은 노란 송충이의 발견이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가설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덧붙여 노란 송충이는 물론이고 검지도 않고 까마귀도 아닌 것, 이를테면 보라색 암소, 하얀 분필, 빨간 스틸레토 등이 “모든 까마귀가 검다”를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어떻게?
가설은 무엇에 의해 입증되는가?
과학에서 가설(hypothesis)의 입증(confirmation)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우리가 수용하고 있는 다양한 과학적 가설을 생각해 보라. 가설은 증거(evidence)에 의해 입증될 때에만, 수용할 수 있으며 주장 가능하다. 그렇기에 어떤 가설을 지지하는 과학자는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를 모으려 하고, 그 가설을 반대하는 과학자들은 그것을 뒤집는 증거를 모으려 한다. 그렇기에 과학 논문을 읽다 보면 ‘증거’나 ‘지지’와 같은 표현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앞선 인용문에서 헴펠이 말한 바와 같이 입증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철학적 이론은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e는 h의 증거이다” 혹은 “e는 h를 입증한다”가 참이 되는 조건을 규정하는 이론 중 철학자 (거의) 모두가 지지하는 받은 이론은 없다. 실제 많은 과학자들이 “이 가설은 입증되었다”, “이 실험 결과는 해당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이다”와 같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입증 이론이 제시된 적은 없다.
어차피 철학자라는 족속이 남의 견해에 쉽게 동조하지 않으니 불일치는 당연하다 생각하고 넘어가자. 그렇다 해도 과학철학자들이 어떤 입증 이론들을 제안하였는지, 그리고 그 이론들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일단 과학철학 분야 선전용으로 쓰는 글인만큼 자극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질문: 노란 송충이의 발견은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가설을 입증하는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본인의 직관에 따라 대답해 보라.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 같다. 노란 송충이가 까마귀의 색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을 입증할 수 있겠는가? 노란 송충이는 해당 가설과 무관하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직관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할 까마귀 역설은 노란 송충이의 발견이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가설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덧붙여 노란 송충이는 물론이고 검지도 않고 까마귀도 아닌 것, 이를테면 보라색 암소, 하얀 분필, 빨간 스틸레토 등이 “모든 까마귀가 검다”를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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